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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 해당되는 글 6건
2009.08.31 19:53
"죽음은 삶의 끝에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삶과 함께합니다." 
실감나는 말이었다. 젊은 시절 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을 때다.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죽음이 바로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말치고는 심오했다. 알고 보니 생명보험 회사의 광고였다. 

요즘 전에 미처 읽지 못한 신문들을 몰아서 보고 있다. 5월께부터는 바빠서 신문을 제목 정도만 대충 봤다. 나중에라도 볼 요량으로 쌓아 놓았는데, 두 달 치니 그 양이 꽤 된다. 대강이라도 훑어보고 버리려 건성으로 신문지를 넘기다가 위에 옮긴 문장이 내 눈에 팍 꽂혔다. 이 구절은 작년 10월 18일 치 <한겨레>에 실린 글(김지석의 종횡사해: 삶으로 죽음을 이기는 문화) 가운데 일부다. 올해 신문들뿐인 줄 알았는데 작년 신문도 이따금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이 문장을 작년에 봤다면 특별하지 않은, 한낱 몸짓에 지나지 않은 구절일 터. 그러나 2009년 여름 내게 예사롭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정치 한답시고 대운하로 사기나 치는 소인배스런 잡놈들이 우글거리는 우리 시대에 정치가다운 빛깔과 향기를 남긴 두 사람의 죽음 때문이다. 오늘은 '선상님' 한 사람만 이야기하련다. 

흔히 정치인과 유권자 관계가 그렇듯, 김대중과 나 또한 중간에 다리를 놓아 줄 뭔가가 있어야만 하는 사이였다. 이를테면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 같은 데서 보도를 해 줘야 정치인 김대중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당연히 우리 관계는 평등할 리 없었다. 나는 뉴스에 나온 그 사람이 정치인 김대중이라는 것을 익히 알지만, 정치인 김대중은 유권자 심 아무개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을 테니 완전히 일방적인 관계라고 할 수밖에.  

대의민주제를 채택한 사회에서 정치인과 유권자가 직접 만나는 순간이 딱 한 번 있기는 하다. 바로 선거 때다. 그렇지만 김대중과 내게 이 또한 별 인연이 없었다.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 네 번이나 출마했는데, 난 한 번도 표를 준 적이 없다. 1971년 선거와 1987년 선거는 내가 태어나기 전이거나 너무 어려서 투표하지 못했고, 1992년 선거 때는 아쉽게도 두 달 차이로 투표를 하지 못했다.[각주:1] 1997년 대통령 선거는 내가 처음으로 참여한 선거였다. 그런데 다른 선거 때와는 달리 친구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대개 김대중과 권영길, 이렇데 두 편으로 나뉘었다. 다행히 이회창을 찍겠다는 바보는 없었다. 인기는 정권 교체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편이었고, 인철이랑 나는 "보수 야당 따위는 필요없어" 하는 쪽이었다. 결국 인기는 김대중에게, 인철이와 나는 권영길에게 투표했다. 이 선거에서 김대중은 이회창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해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난 그이가 대통령이 되는 데 전혀 도와준 것이 없었다.

우리 세대는 다르고 달라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기에는 삼김이라 불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은 보수 정치인이란 이미지, 구시대 정치인이란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 마빡에 피도 마르면서, 내가 신문도 좀 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떤지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게 되면서, 지금껏 배운 교과서와 현실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대다수 정치인들은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는 모리배에 지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나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네들은 그저 노회한 늙은이들일 뿐이라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 사람을 싸잡아 비난하는 게 공평하지도 가당치도 않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사실 김대중은 남다른 정치인이었다. 근본이 똑똑하고 기품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것을 채우려 끊임 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깜냥도 안 되면서 나라님 한 번 해 보겠다는 노욕에 사로잡혀 사욕을 채우는 데 여념이 없던 김영삼, 김종필에 견주기에는 급이 다른 정치인이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각주:2]라고 했던가? 감추기 어려운 매력들이 그이에게서 은은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퍼져 나와 사람들을 매혹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연설을 정치인으로서 갖춰야 할 첫째 덕목으로 친다면 김대중은 단연 가장 출중한 정치인으로 꼽힐 것이다. 1964년 4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어느 의원에 대한 구속 동의안을 저지하기 위해 다섯 시간 이십 분 동안 연설한 일화는 유명하다. 거침없고 논리 정연한 김대중의 연설은, 그저 남이 써 주는 원고를 받아 교과서 읽듯 하는 다른 정치인들의 연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그이는 고매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이를 높게 평가하는 건, 그이가 아랫사람에게도 결코 하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가 얼마나 성숙한지 가늠할 수 있다. 대통령이랍시고 아무에게나 가리지 않고 반말을 지껄이는 이 아무개는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김대중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바틀렛 대통령이 떠오른다.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The West Wing)에 나오는 바틀렛 대통령(마틴 신이 연기했다)은 김대중을 모델로 삼은 듯 둘은 쏙 빼닮았다. 청중을 휘어잡는 연설가라는 점, 깊이와 폭을 알 수 없을 만큼 박식하다는 점, 엄격한 기품뿐 아니라 다른 이를 배려하는 재치도 겸비했다는 점, 어떤 사람이라도 허투루 대하지 않고 진심으로 존중하는 인격자라는 점이 그렇다. 분야는 다르지만 노벨상을 받은 것까지도 똑같고, 시리즈가 끝나 바틀렛 대통령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김대중 대통령도 더는 볼 수 없게 된 점까지 똑같다. 대통령이 어떠해야 하는지 7년 동안 보고 배웠으면 강아지라도 뭔가 배우지 않았을까? 어디 작은 나라에서 대통령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나라 정치인과 유권자들은 개만도 못하다는 소린가? 도대체 무얼 보고 배웠기에 이처럼 요망한 잡것이 나라님인 양 행세하려 들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이제 사자후를 토하는 연설가, 우리 시대 마지막 연설가가 이 땅을 떠났다. 
그리하여 이제 소통을 아는 정치인, 들을 귀 있는 정치인이 이 땅을 떠났다. 
그리하여 이제 힘 없는 이들을 편드는 투사, 무지렁이 같은 그들을 위해 목소리 높여 줄 투사가 이 땅을 떠났다. 
그리하여 이제 끊어진 조국의 허리를 다시 이은 통일 일꾼,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는 통일 일꾼이 이 땅을 떠났다. 
그리하여 이제 사람 사랑을 실천하는 휴머니스트, 가슴 뜨꺼운 휴머니스트가 이 땅을 떠났다. 
그리하여 이제 진정한 거인이 소인들의 나라를 떠났다. 

쇼펜하우어는 진실이 그 정당성을 얻으려면 세 가지 단계가 거쳐야 한다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모든 진실은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 단계에서는 비웃음을 사고, 둘째 단계에서는 격렬한 반대를 받는다. 마지막 셋째 단계에서야 비로소 자명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빨갱이라고 하기엔 너무 우파스러웠던 당신, 김대중 선생님. 
당신은 온갖 비웃음과 격렬한 탄압을 끝내 극복하고 이제 진정한 거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영면하시길…….

  1. 덕분에 선거권도 없는 애송이라는 놀림을 당해야 했다. 재미있는 건 나를 놀린 장본인인 인철이도 하루 차이로 투표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선거날은 12월 18일이었는데, 인철이 생일은 12월 20일이었다. 아마 1972년 12월 19일 생까지만 투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2. 주머니에 든 송곳을 이름.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됨을 뜻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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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5 14:05

작년 여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이번 세계경제 위기는 1980년대 이후 득세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위기라고 흔히 이야기한다. 또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정부의 시장 개입과 규제 강화, 국유화 조처가 확산되자, 신자유주의 시대는 종언을 맞이했다고도 한다. 아울러 오늘날 경제위기에 대한 처방은 케인스주의로 복귀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케인스주의적 분석과 처방은 이제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 정착한 듯하다. 예컨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자유주의를 전도했던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 타임스>와 같은 주류 매체들이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고 개종 선언을 한다든가, “지금은 케인스적 처방을 요구하는 케인스적 상황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위기에 대한 케인스적 진단과 처방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부정확하고 부적절하다. 우선, 이번 세계경제 위기는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것이 아니라, 그 훨씬 전인 70년대 이후 이윤율의 장기저하에서 비롯된 장기불황의 연장선상에서 폭발했다.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는 70년대 이후 장기불황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으로 출현한 것으로서, 이는 금융화, 사유화, 세계화 및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 강화를 통해 불황을 타개하려는 전략이었다. 신자유주의 전략은 이윤율의 장기저하 추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쌍둥이 거품(닷컴 거품과 주택 거품)에서 보듯이, 일시적인 거품 호황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70년대 이후 장기불황 추세 속에서도 30년대와 같은 대공황에 빠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럭저럭 굴러올 수 있었다. 2007년 미국의 주택 거품 붕괴에서 시작된 오늘날의 세계경제 위기는 이제 거품 키우기를 통해 대공황의 도래를 지연하려는 신자유주의 전략이 먹혀들지 않게 되었음을 입증하는 사태다.

오늘날 세계경제 위기 국면에서 케인스주의가 부활하는 배경에는 케인스주의 덕분에 자본주의가 30년대 대공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는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30년대 대공황은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영구 군비경제와 대량의 자본 파괴를 배경으로 한 이윤율의 상승과 함께 종식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 자본주의 주요 국가가 적자재정을 중심으로 한 케인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채택한 것은 1970년대 이후 장기불황이 시작되면서부터인데, 이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촉발하여 신자유주의로의 정책 전환으로 귀결되었다. 경제위기의 문제를 유효수요의 부족이나 금융 불안정성과 같은 유통과 금융의 문제로 파악하는 케인스주의로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내적 모순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이윤율 저하에서 비롯된 경제위기를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늦출 수 있을 뿐 근본적으로 해결하거나 완화할 수 없다.

오늘의 세계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의 특정한 정책체제(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 모순에서 비롯된 위기이므로, 케인스주의라는 또다른 정책체제로 회귀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세계경제 위기는 현 체제하에서는 지난 세기 30년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능가하는 야만과 파괴의 과정을 통해 이윤율 상승의 새로운 기초가 마련돼야만 극복할 수 있다. 진보 진영이 이미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로 전화된 케인스주의(“좋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운동과 민주적 참여계획경제 구현에 전력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성진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원문: 한겨레신문 2008년 10월 25일 한겨레 시론 '케인스주의가 해법일까?'


이번에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그렇지만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고드는 글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들 파생상품이라는 허상에 취해 함께 '사기그릇을 돌린' 공범들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사람이란 생명 자체가 덜떨어진 존재기 때문이다. 덜떨어진 존재인 사람들은 겉모습에 집착하기 일쑤다. 껍데기를 벗겨 내고 고갱이를 끄집어 내야 하는데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위에 옮긴 글은 오늘 <한겨레신문>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을 읽다 문뜩 떠오른 낱말이 있다. 근본주의자.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따지지 말자. 다만 내 느낌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근본주의에 관한 글은 다음에 쓰겠다. 이 글은 시절에 아주 맞춤한 글이다. 정성진 교수다운 글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글, 무척 반갑다. 오랫동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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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8 01:37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무더운 여름 한낮 시집을 읽을 때, 에어컨보다는 덜덜거리는 골드스타 선풍기 바람이 더 낫다. 조금만 움직거리면 땀이 쏟아져, 하릴없이 대자리 깔고 누워 백석의 시를 읽었다. ‘개이빨’을 ‘개니빠디’라 하는 평북사투리가 정감 있다.
그중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라는 시가 재미있다.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방안에는 성주님, 토방에는 다운구신, 부엌으로 도망가면 조앙님, 고방에는 제석님, 굴통에는 굴대 장군, 대문 열고 도망가면 수문장, 밭마당귀에 연자당 구신. “나는 고만 기겁을 하여 곧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마라 내 발 뒤축에는 오나가나 붙어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가 없다.”
바로 지금 이 나라가 ‘맨천 구신’뿐이다.
먹기 싫은 미국 쇠고기 사 가라, 먹으라 성화대는 구신, 촛불 들면 물대포 쏘는 구신, 정부 정책 비판한다고 수사 으름장 놓는 구신, 50대 민간인 여성을 총으로 쏘는 구신,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구신. 이렇게 나오는 북이며 일본에 대해 아무 대책이 없는 구신. 나라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우리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바로 내 발 뒤축에 오나가나 붙어다니는 달걀구신이 제일 무섭다. 이 모든 사달은 기실 바로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그렇다. 우리는 된장에 김치 말고 부드럽고 고소한 마블링 쇠고기를 싼값에 잔뜩 먹고 싶다. 그래서 미국 소 장사들은 풀 먹는 소에게 고기를 먹인다. 나 하나가 쇠고기 먹으면 네 사람분의 곡식이 없어져도 나는 고기가 먹고 싶으니 이게 바로 달걀구신이다. 지난 석 달 가까이 촛불을 들게 한 이 정부도 바로 우리가 선택했다. 부자 되게 해 달라는 일념으로, 공익을 실현하는 대통령 자리에 돈만 쫓아다니는 회사 사장을 뽑아 놓은 게 바로 촛불 든 우리다. 그러니 단박에 뿌리뽑겠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이야기하면 마땅히 우리 스스로 자신의 죗값을 다 치러야 한다는 말이요, 변증법적으로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세계화를 가장 깔끔하게 정리했다는 <렉서스와 올리브>라는 책을 보면 물보다는 콜라를, 떡보다 햄버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의 속성상, 세계화나 신자유주의라는 귀신은 아프간 산골이나 아프리카 밀림에까지 반드시 출몰하게 되어 있다. 바로 내 발 뒤축에 오나가나 붙어다니는 달걀구신을 못 본 체하고 마을에 득시글대는 바깥구신들만 탓할 수는 없다. 효율, 돈, 편안함을 쫓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이길 현실적 대안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 신자유주의를 무너뜨리는 최대 복병은 바로 신자유주의 자신뿐이 아닌가 싶다.
벌써 그 조짐이 보인다. 금융 자본은 온갖 최신기법을 동원해 부가가치를 눈덩이처럼 불려가다가 마침내 전세계에 신용 위기를 가져왔다. 값싸고 맛있는 쇠고기 좋아해서 소를 소 대접 않고 소에게 소를 먹이다가 급기야는 끓여도 죽지 않고 0.001g만으로도 사람을 죽게 만드는 프리온이란 괴물을 만들었다. 변증법의 섭리라면 섭리일까.
신문을 펼치면 온통 무서운 귀신들 이야기뿐.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같은 시는 그만 접고 백석의 또다른 시나 한 수 읽어보자.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는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김형태 변호사



우리 집에는 백시나가 엮고 다산초당에서 낸 백석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있다. 책 앞에 적어 놓은 걸 보면, 2006년 12월 29일 헤이리에 놀러 갔다가 '북하우스'에서 산 책이다. 제일 먼저 나오는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반해서 샀는데 시집 뒷부분에 <마을은 맨천 귀신이 돼서>처럼 멋진 시가 숨어 있는지 몰랐다. 분명 다 읽었는데 말이다. 내가 아직 눈이 밝지 못하다는 소리겠지.

요즘 소고기 문제로 온 나라가 몇 달째 시끄럽다. 명백히 이명박 정부가 잘못했다. 그걸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촛불을 드는 것은 정당하며, 오히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명박 정부를 타도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이 문제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밑바탕을 드러내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목숨을 목숨으로 대하지 않고,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 바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풀을 먹고 살게끔 태어난 소한테 고기를, 그것도 같은 소를 갈아 먹일 수 있단 말인가? 소를 소로 여기지 않고, 소를 소로 '대접'하는 뻔뻔스러운 행위는 신의 창조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불경이다. 소가 병들어 미친 것이 아니다. 정작 미친 것은 그걸 팔아먹겠다는 인간이다. 화 있을진저, 그 소를 팔아 자기 뱃속을 채우겠다는 자본주의여. 돈 때문에 소를 먹인 소고기를 팔아먹는 자, 장차 사람 고기로도 장사할 치들이다.

그 치들뿐만이 아니다. 다들 이번 기회에 채식주의를 고민해 봐야만 한다. 아무리 돼지들이라고 해도, 닭이라고 해도, 소라고 해도 인간에게 먹히라고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커다란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날개 달린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이것들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닷샛날이 지났다.
(창세기 1장 21~23절, 새번역)

신이 닷샛날 동물을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다고 하시지 않았다. 정작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다고 한 자는 인간, 아담과 이브였다. 나중에 죽어서 그 많은 돼지들과 닭들, 소들을 어떻게 얼굴을 들고 마주 볼 수 있을지 두렵다. 이제 백석 말마따나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두막)’에서 살 각오를 해야 한다. 가난한 나와 함께할 아름다운 나타샤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하지 않을까?

김형태 칼럼은 바로 그 점을 짚고 있다. 그래서 좋은 글이라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김형태 변호사는 천주교 신자다. 그리고 <공동선>이라는 격월간 잡지 발행인이기도 하다. 언젠가 한번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다.

밑에 <마을은 맨천 귀신이 돼서>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을 옮긴다. 아마 김형태 변호사가 읽은 시집과 내가 읽은 시집이 다른 본인가 보다. 조금 다르다.


마을은 맨천 귀신이 돼서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귀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귀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뚜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 버리면 고방에는 또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 안으로 가면 뒤울 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귀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당귀신
나는 고만 질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 다니는 달걀귀신
마을은 온데간데 귀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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