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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15. 21:38
[익자삼우]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는 좁아지기 마련이야.
언젠가 (황)인철이가 내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황가 이 친구는 20세기의 마지막 해를 이처럼 의미심장하게 한마디로 마감하더니만, 21세기 첫 달에 장가를 가 버렸다. 자신의 인간관계가 갈수록 좁아지는 게 두려웠기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꼴을 나보고 한번 당해 보라는 심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나는 가장 가까운 친구를 내 손으로 호기롭게 새색시에게 넘겨준 꼴이 되었지만 말이다.
내가 예나 지금이나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제법 큰소리치기는 하지만, 사실 그렇게 사람 사귀는 데 야박하지 않다(고 주장하련다). 요즘이야 청구서가 무서워 전화를 많이 하지는 않지만, 난 아는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전화도 하고 서로 시간이 맞으면 만나 수다도 떤다. 그렇게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만나는 친구들이 조금 있다. (황)수연이도 그런 친구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처음 수연이를 알게 된 것은 지금은 망해 없어진 '라 스트라다'(La Strada) 덕분이다. 라 스트라다는 나들목교회에서 잠깐 운영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돈만 말아먹고 실패한 '비전'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나들목에서는 아무도 라 스트라다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물론 책임지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하여간 수연이는 라 스트라다 로고와 인쇄물 몇 가지를 디자인했고 나는 그 디자인을 받아 인쇄해 납품하는 일을 했다. 교회 일이라 둘 다 자원 봉사를 한 셈이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수연이는 디자이너로 나는 제작자로 몇 번 같이 일했다.
내가 이따금 수연이 만난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좀 있다. 사실 수연이는 성격이 예민한 편이고 더욱이 낯을 많이 가린다. 그렇지만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사귀기는 어려워도 친해지면 편한 사람. 수연이가 그런 사람이다. 우리는 일 때문에 만난 사이고 같은 교회를 다녔으니 천천히 친해질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친구와 내게 비슷한 동류의식이 있었다고 하면 내가 넘겨짚은 것일까? 하는 일도 비슷하고, 둘 다 커피 좋아하고, 부모 이야기 또한 엇비슷하고, 서로 부담스럽지 않게 처신한다는 점도 그렇고. 무엇보다 나나 그 친구나 나들목에서 비주류였다. 내게 주류 쪽 사람들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었다면 그 친구는 예의 바르기는 하나 사람들을 좀 어려워했다고나 할까? 참 둘 다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점도 비슷하구나.
그 수연이를 일요일 오후 인사동에서 만났다. 지금껏 밥 많이 사 줬으니 이번에는 좀 얻어먹으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8월에 만났을 때는 아무 얘기 없더니 이달 27일에 결혼한단다. 신랑은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라는데 어찌어찌해서 작년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집안끼리 가까운 사인가 보더라. 결혼 날짜 잡은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시아버지 될 분이 사랑의교회 장로시란다. 그분이 다른 일 때문에 교회 사무처에 갔다가 12월 27일 하루가 비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결혼식 날을 잡았다고 하더라. 주례는 옥한흠 목사님이 해 주신단다.
내가 결혼식에 갈 일은 없을 듯해서 따로 만난 것이다. 인사동 커피빈에서 그리고 내가 가끔 사람들 데리고 가는 '칠갑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수다다. 신랑이 미국에서 일한단다. 그래서 수연이도 엘에이 가 살 거라고 한다. 수연이에게 교회만 잘 다녀면 시집도 가도 장가도 가는구나, 너 결혼하는 것은 좋지만 미국 가면 나랑 같이 수다 떨 사람 하나 없어지는 건데 미국 안 가면 안 되냐 하고 우스갯소리도 하고 그랬다. 원주 사는 조카 녀석도 똑같은 말을 했단다. 아마 내 정신연령이 그 초등학생 조카랑 비슷한가 보다.
결혼한다고 다 멀어지는 건 아니지만 엘에이는 너무 멀다. 같은 서울에 살아도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말이다. 우리나라에 잠깐 들어오게 되면 꼭 전화한다고 다짐은 받았다. 글쎄, 또 볼 수 있을까? 아무튼 그런 건 하늘에 맡기고 결혼해 잘 살기를 바란다. 수연이는 영어도 잘하니까 미국 가서도 잘 살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내가 걱정이지 딴 사람들은 잘 살 거다.
다음 주에는 수연이가 가르쳐 준 '왓더북'(what the book)에나 다녀오련다. 왓더북은 영어책을 파는 헌책방으로 이태원에 있단다. 필요한 책이 있어서 교보나 예스24에 주문하기 전에 들리려 한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인철이나 한번 봐야겠다. 그 친구가 우리 집에서 산 적도 있고 내가 그 친구네 집에서 신세 진 적도 있어 서로 지겹도록 만난 시절도 있었지만, 인철이 결혼하고는 몇 번 만나지 못해서 많이 아쉽다. 마누라가 그렇게 좋은지...... 오랜만에 만나 맛있는 거나 얻어먹어야겠다.
사진 찍히는 거 싫어하는 사람 참 많다. 이래서야 찍사들이 먹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참에 망원렌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