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133)
살아 있다는 느낌 (46)
익자삼우 (23)
요산요수 (12)
수불석권 (23)
구이지학 (11)
천의무봉 (16)
섬섬옥수 (2)
pawn shops near me that buy guns
pawn shops near me that buy guns
http://info.silvercentral.net
http://info.silvercentral.net
http://sightings.elvissighting..
http://sightings.elvissighting..
http://clients.trafficbackdoor..
http://clients.trafficbackdoor..
business.easyprofitsreview.com
business.easyprofitsreview.com
92,021 Visitors up to today!
Today 1 hit, Yesterday 1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Candle
'용서'에 해당되는 글 3건
2010.12.31 15:48

오전 10시 55분 그는 911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여자 아이들 열 명을 인질로 잡고 있다. 모든 경찰은 건물에서 나가기를 바란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2초 안에 아이들은 죽을 것이다. 2초 안에!” 


2008년 가을 친구 소개로 <아미시 그레이스>(Amish Grace)란 책을 편집하게 되었다. 백수로 지낼 때여서 “얼씨구나” 하고 받았다. 웬걸, 곧 ‘이런 개 같은……’이 되고 말았다. 번역된 원고를 누가 한 번 교정 본 것이라기에 한 보름이면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두 달이나 붙잡고 있어야 했다. 무슨 말인지 대충은 알겠지만 명확하지 않은 문장 투성이었다. 한 문장씩 원서와 대조해 확인한 다음 우리말답게 손보는 지루하고 지난한 작업을 거쳐야 했다. 하도 힘들어서 나중에는 책상에 앉는 것 자체가 겁이 날 정도였다.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대충하고 싶지는 않았다. 몇 쪽 작업하다가 그만 울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로버츠는 여자 아이들에게 돌아섰다. “너희들은 우리 딸을 대신해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방에 있던 열세 살짜리 소녀 메리언이 재빨리 어린아이들을 다독이며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아이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메리언이 말했다. “나를 먼저 쏘세요.”(51쪽)


2006년 10월 2일 월요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니켈 마인스에 있는 아미시 초등학교에 한 남자가 난입해 아이들을 총으로 쏘고 자살했다. 여자 어린이 다섯 명이 죽고 다섯 명이 크게 다쳤다. 이른바 ‘아미시 마을 총기 난사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미국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아미시 사회는 미국에서 물질문명에 물들지 않은 거의 유일한 곳으로, 미국인들이 마지막 남은 천국인 양 동경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총기 사건이 터지다니……. 이제 미국에서 안전한 곳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게 된 꼴이다. 그렇지만 정작 더 놀랍고도 감명 깊은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용서였다. 곧바로 아미시 사람들은 살인자인 찰스 로버츠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이의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복수와 고소가 넘쳐 나는 미국 사회로서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낯선 충격이었다. <아미시 그레이스>는 니켈 마인스 총기 사건에서 시작해, 총기 사건 뒤 아미시 사람들이 어떻게 범인을 용서하고 비극을 초월했는지 보여 준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눈물이 고였다. 빨간 펜을 들고 징징 짜는 남자라니. 꼴이 참 우스웠다. 그렇지만 “나를 먼저 쏘세요”라니! 어떻게 열세 살짜리 아이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 아이가 용감할 수 있었던 건 무슨 까닭일까? 그리고 어떻게 아미시 사람들은 그토록 쉽게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용서야말로 누구나 찬양하지만 모두들 피하고 아무나 못하는 것 아닌가?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내 밥벌이를 핑계로 나를 찬 옛날 여친이 아직 밉고, 나를 부당하게 해고하고도 잘난 척하는 그 사장놈은 더더욱 밉다. 게다가 내 밥상에서 김치가 사라지게 만든 대통령은 어떤가? 배추 대신 양배추로 김치 해 먹으라는 그 어처구니없는 대통령이란 작자를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전혀 용서할 생각이 없다. 미운 사람 고운 데 없고, 고운 사람 미운 데 없다는 속담대로 여전히 나는 미운 사람이 밉고 앞으로도 미워할 작정이다. 


돌아보면 이런 게 인연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미시 그레이스>를 우연히 만났을 뿐이다. 게다가 나를 정말 힘들게 한 책이었다. 그렇지만 내 편집 경력에서 빼고 싶지 않은 작업이었다. 원고를 읽다가 울어 본 편집자가 얼마나 될까?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 10월이면 아주 잠깐이나마 아미시 사람들과 그들이 보여 준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본다. 평범한 사람인 내가 얼마나 관대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곱씹어 본다. 물론 개념은 없고 똘기만 충만한 그 인간들은 정말 밉다.


아미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아미시 그레이스>에 잘 설명되어 있다. 


Amish Grace와 <아미시 그레이스>

이 글은 민주언론시민연합 소식지인 <날자꾸나, 민언련> 10월호에 실린 글이다. <날자꾸나, 민언련>에는 '이달의 인물'이라는 꼭지가 있는데 어쩌다가 내가 청탁받아 쓰게 되었다. 10월과 관련 있는 인물 중에서 골라야 해서 처음에는 골치가 아팠지만 전에 써 놓은 블로그 글(아미시 그레이스, 어떻게 용서는 비극을 초월하였나) 덕분에 마무리는 쉽게 할 수 있었다.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을 거의 정확하게 지켜서(1,998자) 담당 간사에게 칭찬받았다. 헤헤. 


책 내용도 훌륭했지만 내게 이 책이 중요한 것은 편집하면서 대단히 좋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원서와 대조하는 과정은 생략하려 했다. 그 작업료로 원서 대조까지 하면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렇지만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참 좋은 책을 '그 따위' 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원서 Amish Grace와 번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하는 작업을 먼저 해야 했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내가 배운 게 많다. 우리말과 영어가 어떻게 다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고, 우리말을 어떻게 구사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2008.10.03 23:30
며칠 전 내 블로그에 <소설>이라는 재미있는 소설을 짧게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앞부분을 보면 재세례파(아나밥티스트, anabaptist)에 관한 간결하면서도 자세한 내력이 나온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 지대인 알자스(알퐁스 도데가 쓴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기도 한 곳)에 사는 독일계 사람들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에 남다른 반응을 보였다. 특히 유아세례가 옳지 않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스스로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나이에 세례를 받는 게 올바르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이 유별난 사람들에게 깔본다는 말맛을 띤 재세례파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들은 독특한 신앙을 이유로 모진 박해를 받았지만 신앙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때마침 영국 사람 윌리엄 펜(이 사람은 퀘이커 교도란다)이 신대륙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주선해 주었고, 재세례파 사람들은 자유로운 신앙을 찾아 지금 펜실베니아라 불리는 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펜실베니아는 '펜의 숲'이란 뜻이란다. 

한데 펜실베니아에 정착한 사람들도 곧 신앙 문제로 둘로 나뉘게 되었다. 더 보수적인 사람들, 그러니까 전혀 문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미시(amish) 또는 아만 파라 불리며 주로 랭커스터에 자리를 잡았고, 덜 보수적인 사람들, 문명을 적극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지혜롭게 사용하자는 사람들은 메노나이트(mennonites) 혹은 메노 파라 불리며 주로 드레스덴에 자리를 잡았다. 제임스 미치너는 <소설> 의 주요한 화자 가운데 한 사람인 루카스 요더는 집안이 메노 파, 아내 엠마 요더는 아만 파라는 내력을 두 쪽에 걸쳐 짧지만 딱 맞춤한 짜임새로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뉴스앤조이' 사무실에 가면서 읽었다. 뉴스앤조이는 이번에 <아미시 그레이스>(Amish Grace)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번역된 원고를 손봐 줄 편집자를 찾았고 지건이가 나를 소개해 주었다. 돈을 많이 주지는 못한다고 해서 얘기나 좀 해 보자고 찾아가는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이거 나보고 하라는 소린가 보다'는 느낌이 문득 떠올랐다. 어차피 놀면 뭐 하나 하는 생각에 덥썩 받아오기는 했다. 번역도 잘된 거 같아서 쉽게 할 수 있을 거란 속셈도 없지 않았다. 

원고는 몇 년 전 아미시 마을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2006년 10월 2일 오전 10시 20분께 펜실베니아 랭커스터 카운티 니켈 마인스에 있는 아미시 학교에 한 사람이 트럭을 몰고 들어왔다. 동네 사람인 찰스 로버츠였다. 곧이어 11시 5분께 총소리가 여러 발 울렸다. 학생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총을 쏜 찰스 로버츠는 그 총으로 자살했다. 여자 어린이 다섯 명이 죽었고, 다섯 명이 크게 다쳤다. 이른바 '아미시 마을 총기 난사 사건'이다. '파란 펜'을 들기 전에 먼저 원고를 읽는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친다. 

그러고 나서 로버츠는 여자 아이들에게 돌아섰다. "너희들은 우리 딸을 대신해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방에 있던 13살 소녀 마리안은 재빨리 어린아이들을 다독이면서 그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였다. 아이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서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자기의 의무를 다하려 노력했다. 마리안은 말했다. "나를 먼저 쏘세요."

어떻게 열세 살짜리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다. 

아미시 사람들은 찰스 로버츠의 홀어미와 자녀들도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남편과 아버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생활도 잃어버린 희생자-라는 사실을 빨리 깨달았다. 희생된 아미시 사람들과는 달리 로버츠의 가족은 죄 없는 아이들과 그 가족에게 고통을 안긴 가족을 두었다는 부끄러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벌써 몇몇 아미시 사람들은 로버츠의 가족과 접촉하고 있었다. ...... 

총기 난사 사건 다음 날, 에이미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잃은 아미시 사람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은 로버츠가 우유를 수거하던 집이었다. "나는 죽은 아이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엌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서로 얼싸 안았습니다." 로버츠의 친척이 회상했다. "그들은 어떤 원한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용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믿기 힘든 말이었고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면서 그 친척이 말했다. "많은 아미시 사람들이 용서와 위로와 함께 선물을 주려고 에이미의 집에 들렀습니다. 나는 아미시 사람들이 에이미네 집에 올 때 창문으로 그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컬럼바인 사건을 비롯해 지금까지 미국에서는 수많은 총기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아미시 마을 총기 난사 사건은 이전 사건에서 볼 수 없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용서. 누구나 말하면서 아무나 못하는 것. 말은 쉬어도 정작 하기 어려운 것, 그게 바로 용서 아닐까? 세상은 현대 문명을 기꺼워하지 않는 아미시 사람들을 때로는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고 때로는 어리석다 깔보기도 했는데, 정작 그 기고만장한 세상은 용서를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세상은 이런 용서를 보여 줄 수 있는가?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자본주의 시대에는 결국 용서도 단지 말로 소비할 뿐일 텐데 말이다. 우리는 아미시 사람들이 보여 준 용서와 겸손, 자비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바로 어제가 2주년인 10월 2일이었다. 원고를 받아 와서 일을 하고는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다 <뉴스앤조이>에 올라온 기사를 보고서야 그날이 그날인 것을 알았다. 개념 없이 사는 내 꼴이 참으로 한심하다. 

언젠가 유숙이 누나랑 산책하는데 누나가 노래를 나지막이 부르더라.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이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더라." 그래, 내 영혼이 은총을 입은 건 내가 잘 아는데 나는 왜 요렇게밖에 못 사는 것일까? 누나가 엄마 얘기를 잠깐 꺼냈지만 난 지금껏 고수한 방침대로 무시했다. 난 아직 세상에 속한 사람이니까.

우습게도 내가 아미시 사람들을 알게 된 것은 <엑스 파일> 때문이다. 언젠가 <엑스 파일>에서 아미시 사람들을 소재로 에피소드를 하나 만든 적이 있다. 내용은 아주 단순했다. 멀더가 아미시 사람들을 조사하다가 그 사람들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바로 쳐들어갔는데 그 사이 다 사라졌다는,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때 본 검은 옷, 수염, 모자, 마차 이런 것들이 아미시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 셈이다. 그렇지만 난 그 사람들이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문명을 거부해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신앙이 문제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아미시 공동체가 기독교인 한동아리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알게 되었으나, 그 계통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바로 얼마 전이었다. 아무튼 아미시 공동체가 미국 사회에 비친 모습이 그런 듯하다. 마치 외계인 같은 이미지 말이다. 

| 2008.10.15 02:06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비밀댓글입니다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2008.06.21 10:57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밀양, 신애의 절망 그 상처 빼닮은 살인자의 딸

1. 밀양(密陽)을 굳이 ‘빽빽한 빛’으로 풀었습니다. 용서라는 주제의식 속에 영화를 새길 때, 신애가 살인자의 딸의 손에 머리카락을 맡기는 그 짧은 순간 속에 용서의 빛이 ‘빽빽하게’ 응결했다고 여깁니다. 신을 매개(媒介)로 한(했기에) 신애-살인자 사이의 용서는 어긋나지만, 오히려 상처 받은 약자로서 그 딸을 매개로 그 용서의 빛은 다시 소생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요체는 ‘신⇒딸’로 옮아가는 매개의 변화에 있지요. 2. 다소 의도적으로 종찬의 시각을 생략했습니다. 종찬은 그 자체로 장편의 비평이 필요할 만큼 흥미로운 존재이고, 또 ‘밀양’이라는 빛의 내용을 용서로 제한시켰기 때문입니다. 3. 이창동은 기복이 없는 일급이고, <밀양>은 <인디아나 존스> 따위의 영화 30개와도 바꿀 수 없는 수작입니다. 그가 또 영화를 내면 무조건 보시기 바랍니다.

약자는 강자를 용서할 수가 없다. 의지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가령 김대중씨가 전두환 일당을 사면하는 것과 망월동의 고혼들이 용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일본을 용서하는 판국에 친일파를 용서하지 못하랴?’라고들 하지만, 친일파가 여태껏 사회적 강자의 자리를 점유할 수 있다는 한국 근현대사의 공공연한 비밀이 번연한 터에는 어림없는 소리다. 천 년이 지나도 용서할 수 없다. 아니, 도덕의 탈을 쓴 정치적 구호로는 오히려 상처의 실재를 밀어낼 뿐이니 용서란 오직 불가능하다. 그래서 리쾨르는 ‘망각일 뿐인 용서’를 경계하고, 카뮈는 용서를 위한 철저한 기억을 주문한다.
하지만 종종 그 불가능을 넘어서고픈 욕동이 솟구치기도 한다. 언젠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은 사람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신문은 한결같이 미담으로 각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낱 세속의 피해자이지 십자가상에 달려 용서를 말하는 예수[神]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그리고 세속은 억압된 기억의 실재를 기어코 되불러내는 법이며, 되불려나온 상처는 이미 치료가 불가능해진다.
이 불가능한 용서를 욕심내는 일은 겉으로 보아 영웅적이다. 용서를 향한 그 도덕적 강박은 차마 초인적이기조차 한데, 관념 속에서 스스로를 영웅시·초인화하려는 이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곧 나르시시즘이다. 영화 <밀양>에서 아이를 잃은 신애(信愛!)가 상실과 자책의 고통과 대면하는 가운데 나르시시즘에 빠져가는 장면들은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나르시시즘은 외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모습을 취하며 깊어간다. 여기서 종교는 결정적인, 그리고 거의 유일한 계기를 제공한다. 물론 종교란 사랑과 더불어 대표적인 나르시시즘의 형식이다. 실존의 고독과 고통 속에서 종교에 의탁한 신애는 제 마음대로 신의 의지를 읽어내면서 그 의지를 자신의 원망(願望)과 동일시한다. 그러고는 그 용서의 무대,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야 하는 비극적이며 영웅적인 무대에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어느 화창한 날, 신애는 외려 참척(慘慽)의 절망을 씨앗 삼아 떳떳하게 가꾼 나르시시즘을 뽐내고자 꽃을 꺾어들었다. 예배를 마친 뒤에 용서의 ‘의도’를 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찾아 굳이 교도소로 간다. (아아, 신애씨, 대단해요!) 그러나 문제는, 신애를 용서의 강박으로 내몬 바로 그 신이 유독 신애만의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신을 믿고 있었고, 누구나 자신의 ‘의도’ 속에 신을 담아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애만의 영웅적 용서의 대상이어야만 할 감옥 속의 그 남자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저 홀로 ‘생각’하고 있다. 신애의 ‘의도’나 그 남자의 ‘생각’은 모두 신으로부터 발원했지만, 신애의 의도는 그 남자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 세속의 어긋남, 내 의도와 타인의 현실 사이의 어긋남과 부닥친 신애는 그만 실신하고 만다. 그러나 교도소 앞에서의 실신 장면은 실은 꿈에서 깨는 장면과 다를 바 없다. 그간 자신을 관념적으로 보호하고 변명하던 나르시시즘의 거울방[鏡箱]에서 이로써 떨쳐나오는 셈이다. 그리고 그 나르시시즘의 균열과 더불어 신애의 몸부림은 다시 시작된다. 애초에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건졌던 바로 그 나르시시즘의 환상은 이제 적대적 짝패로 둔갑한다. 아직은 현실 속으로 내려앉지 못한 신애, 아직은 용서를 세속과 시간과 타자의 문제로 이해하지 못한 신애는 여전히 신을 붙잡고 늘어진다. 영화는 신과 대결하는 신애의 모습을 매우 인간적으로 묘사한다. 나르시시즘 속의 신과 함께 웃었던 그가 다시 나르시시즘 속의 신과 더불어 울고 있는 것이다. 무릇 억압된 것은 증폭되는 법, 그사이 다시 돌아온 죄책감은 더 커져버렸고, 급기야 신애는 죄책감의 정점에서 자해에 이른다.
살인자의 중3 딸은 그 아버지에 의해 승합차 속에 끌려온 채로, 남편과의 사별 후 말없이 아버지를 떠나 밀양으로 온 신애와 처음으로 대면한다. 그리고 아득한 미래의 기억 속에서 상처는 상처를 본다.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종교에 귀의한 신애의 시야에, 그 딸은 도시의 한구석에서 또래의 남자애들에게 얻어맞고 있는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구타당하는 중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신애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그 하염없는 시선은 도시의 기원과 성격을 묻는 희생양의 것이다. 그러나 희생양의 슬픔은 의문이 아니라 동종의 상처 속에서만 깊게 다가선다. 신애의 궁극적인 만남이 교도소의 살인자가 아니라 미장원의 딸과 이루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해한 후 병원에서 퇴원한 신애가 들른 미장원에는 소년원을 갓 출옥한 그 딸이 “학교를 때리(려)치운 채” 미용사로 일하고 있었다. 딸은 신애의 머리카락을 반쯤, 그것도 왼손으로, 깎아줄 수 있었다. 머리를 깎다 만 신애가 미장원을 뛰쳐나왔다는 사실은 내겐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더 중요한 사실은, 피해자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가해자의 딸손에 맡긴 그 짧은 순간 속의 ‘빽빽한 빛’[密陽]이기 때문이다.
신애는 자신에게 용서의 힘을 준 바로 그 신에 의해 ‘명시적으로’ 용서를 도난당했다. 그러나 신, 혹은 나르시시즘을 매개로 한 살인자와 신애의 용서 게임은 결국 현실에 이르지 못한다. 그 현실은 살인자의 딸이 겪는 세속의 상처와 더불어 되살아난다. 신애는 왼손의 그녀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반만 맡김으로써 ‘묵시적으로’ 용서를 되찾는다.
내 집에서 나오면 곧 ‘송강호 거리’라고 쓰인 간판이 전봇대 높이 걸려 있고, 잠시 걸어 오르면 종찬이 일하던 그 카센터가 여전히 영업 중이다. 종찬은 극히 흥미로운 캐릭터이고, 신애 역에 지지 않는 주인공이다. 종찬은 <오아시스>(2002)의 종두(설경구)와 더불어 한국 현대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남성 연기의 풍경을 이룬다. 종찬이 다만 자신의 세속적 욕망에 응해서 신애를 선택적으로 주목했고, 일반자(一般者) 중의 한 매력적인 개체를 제 나름대로 소유하려는 것인지, 혹은 신애와의 만남 자체로 그 자신의 존재와 삶의 양식이 뒤바뀐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용서의 빛’에서 바라본 종찬의 역할은 의외로 미미하고, 그가 신애에게 바치는 충실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천의무봉(天衣無縫) [명사]
1. 천사가 입는 옷은 꿰맨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일부러 꾸민 데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서 완전함을 이르는 말. 《태평광기》에 쓰인 곽한(郭翰) 이야기에 나오는 말로, 주로 시가(詩歌)나 문장에 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2. 완전무결하여 흠이 없음을 이르는 말.
3. 세상사에 물들지 아니한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을 이르는 말.

나그네 | 2009.05.18 20:37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우연히 들어왔는데 글이 좋아서 잘 읽고 갑니다.
밀양을 저도 너무 아프게 본지라서... 글 마디마디가 새삼 저며옵니다...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