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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에 해당되는 글 2건
2008.11.04 17:18
내가 '화두'라는 말을 처음 배운 것은 1992년이었다. 재수하면서 단과학원을 끊어 다닐 때였는데, 국어랑 수학만 번갈아 들었다. 게으름은 지금보다 그때가 더 지독해 수업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학원으로서는 참 고마운 손님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화두라는 낱말을 들어 본 적은 있었을 테지만 확실하게 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 그때였다. 그날 저녁 국어 선생이 가르쳐 준 화두는 이런 것이었다. "왜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가?" 이 화두가 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것인지 그날은 알지 못했다.

아무튼 내가 생각하기에, '근본주의'란 바로 이 화두와 같다. 사태와 현상의 근본과 원인이 무엇인지 궁리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요, 이치다. 겉모습에 사로잡혀서는 사기꾼들에게 놀아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이 말은 하기는 쉬워도 따르기는 어렵다. 하기사 말처럼 쉬운 일이라면 굳이 이런 화두를 남겨 사람들이 경계로 삼게끔 하지도 않았을 터.

불행히도 내게는 이 근본주의라는 낱말이 두 가지 뜻으로 그때 그때 달리 쓰인다. 하나는 종교에서, 다른 하나는 종교를 뺀 나머지 영역에서, 난 이 말을 문맥에 따라 각각 다르게 느끼고 해석한다. 같은 낱말을 두 가지로 달리 써야 한다는 건 상당한 피로감과 긴장감을 낳게 마련이다. 나름 피곤하다.

먼저 종교에서 쓰일 때를 보자.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면 단절감 같은 게 생기기 쉽다. 교회에서 흔히 쓰는 낱말에서조차 그런 이질감을 많이 느끼게 되는데 내게는 그런 경험이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뭐 경건함이나 거룩함처럼 사회에서 우러르면서도 결코 느낄 수 없는 감동을 맛보게 한다면 그런 이질감은 널리 적극 권해야 할 것이겠다. 그런데 현실이 그런가? 적어도 내게는 아니었다. '근본주의'라는 말도 그렇다.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종교에서 이 말이 쓰일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고리타분함'과 '무식함'이다. 아무리 자신이 경배하는 신에 복종한다고 해도 최소한 머리로 생각할 줄은 알아야 할 텐데, 근본주의자라 불리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기대할 것이 못 된다. 이들은 신에게 나아가다 만 것을 자랑으로 삼는 족속으로, 갈 길이 백두산보다 멀어도 북한산만큼 오르고는 "야호"를 외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내가 다른 분야에서 이 말을 쓸 때 떠오르는 생각은 '철저히 의심함'이다. 이들은 뭔가를 51퍼센트 이상 믿지 않으며 대상이 무엇이든지 가차없다. 그야말로 진리를 향해 용맹정진하는 사람들이다. 요즘은 이쪽에도 배교자와 가짜들이 판을 쳐서 예전만 못하기는 하다. 오만하고 방자하고 게으르다는 점과 함께, 무엇보다 자기 반성을 할 줄 모르고 그런 데 전혀 개념 없는 가짜들이 문제다. 덕분에 안드로메다만 잘 살게 되어 남 좋은 일만 시킨 셈이다. 진짜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줄 알고 이를 중요한 원칙으로 삼는다. 이런 원칙이 있기에 이들은 결코 '종교 근본주의자'가 될 수 없다. 아마 이 족속은 데카르트를 자기네 조상으로 여길 듯하다. 

똑같이 근본주의자라 불려도 이 두 족속은 서로 상대방을 '지옥에 떨어질 불경한 사탄의 자식들', '예수를 팔아 베들레헴을 배둘레햄으로 만든 거짓 덩어리들'이라 비난한다. 같은 말인데도 뜻은 정반대인 셈이지만, 어쩌면 원래 본뜻은 같은지도 모른다. 보수 기독교를 뜻하는 '근본주의'란 말은 결국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사는 것을 가리킨다면, 인문주의자들에게 근본주의란 말은 철저한 인문주의자가 되는 것을 말할 테니까. 그런데 성경이 가르친 대로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철저한 인문주의자란 누구인가? 아무리 신이 못났다고 해도 설마 잘난 인간만 못하겠는가. 신이란 존재가, 그 오랜 세월 준비해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피조물에게 던져 준 성경이 고작 책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성경을 누가 썼느니 하는 논쟁은 하지 말자.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은 사람이 받아쓴 것임은 틀림없다). 신이 바라는 인간의 삶이 기껏해야 자기를 기계처럼 따르는 그런 삶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신이 계획한 인간은 완전한 인간일 테고, 그것이 바로 인문주의자들이 지향하는 인간상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성경도 51퍼센트만 믿고 의심하며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고 싶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인문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인간이라면 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떤 근본주의자가 될 것인지는 고민해야 한다. 신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부시나 사고 능력이 2mb(메가비트)밖에 안 되는 쥐박이처럼 신을 욕되게 하는 치들이 있지 않은가. 부시는 이제 생명이 끝나 기쁘지만 앞으로 4년은 더 봐야 할 쥐박이 때문에 답답하다. 다음은 오늘 <한겨레신문> '왜냐면'에 실린 글이다. 참고 삼아 보시라.

미국의 시카고 대학은 1988년부터 93년까지 전세계 150명의 학자를 참여시켜 지구상의 가능한 모든 근본주의에 대한 보고서를 쓰도록 했다. 그 결과 종교건 문화건 관계없이 근본주의는 다음 다섯 가지 특징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든 국가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의 규칙이 적용돼야 한다.(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규칙은 땅의 법이 되어야 한다.)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다. 규범을 정하고 시행하는 건 남성이어야 한다. 단 하나의 믿음과 시각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정확히 전달해야 하므로, 교과서는 물론 가르치는 방식까지 통제해야 한다. 근본주의와 파시즘의 의제는 동일하다. 경전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역사나 문화적 차이에 따른 해석은 불가하다.

미국의 저명한 목사 데이비슨 뢰어는 이것을 종교화한 것이 종교적 근본주의라고 정의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이슬람 및 기독교 근본주의가 혐오하는 것들을 이렇게 정리했다. 해방된 여성 혹은 낙태 등 여성 해방을 상징하는 것, 동성애 등 다양한 성적 취향이나 생활방식, 유일무이한 진리의 구속력을 떨어뜨리는 개인적 자유와 권리(이슬람), 남성을 따르지 않는 여성, 다양한 성적 취향, 교리에 따라 운용되지 않는 민주주의 정부(기독교). 동일하다.

정치학자 로런스 브릿이 꼽은 파시즘 정권의 공통점 14개 중에는 이런 게 있다. 하나의 원칙과 해석만 허용한다.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나 자유주의자를 국가의 적으로 내몬다. 남성이 배타적인 지배권을 행사한다.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얽혀든다.

근본주의는 종교적 파시즘이고, 파시즘은 정치적 근본주의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근본주의나 파시즘은 실천하기 쉽다. 몇 가지 간단한 원칙만 고수하면서 자신은 사도처럼 고상한 척하면 된다. 교과서까지 통제하려는 이 정부와 많이 닮아 보이지 않는가?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원문: 한겨레신문 11월 4일 유레카 '근본주의와 파시즘'

노파심에 다시 말하지만, 곽병찬 논설위원이 설명하는 근본주의와 내가 생각하는 근본주의는 개념이 다르다. 나는 내 맘대로 생각하고 정의한 것이니 그리 아시라. 아무튼 내가 말하는 근본주의는 원칙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 세상에 믿을 놈 없다." 의심 이야기는 했고, 내가 그리는 인간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무한한 해석을 낳을 것이다. 상상력에 관한 글은 다음에 쓰고 오늘은 다른 글에서 몇 구절 빌려 왔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몇 가지가 있다. ‘호기심을 잃지 말라. 사물을 섬세하게 관찰하라. 당연한 것을 의심해 보라. 엉뚱한 말에도 귀를 열어 두라. 놀이와 경험을 통해 직관을 자극하라.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내라.’

그런데 상상력은 단지 기발하고 엉뚱한 것일까. 미술평론가에서 목수로 변신한 김진송씨는 그런 생각이야말로 오해라며 “상상은 무수히 많은 경험과 사고의 틈 속에서 인식을 넓히는 자유로운 공간”이라고 말한다. 이성으로 포장된 폭력, 합리성으로 위장된 불합리가 현실세계에서 위력을 떨칠 때, “상상의 공간은 비이성과 비합리를 통해서 현실 속에 은폐된 억압, 폭력, 불합리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김진송씨가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다.

정태우 선임 편집기자 windage3@hani.co.kr

원문: 한겨레신문 11월 1일 한겨레프리즘 '당신의 상상력은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결론. 사람이 되자.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는 사람이면서 아직 사람이 아니다. 그래, 장기하가 부른 노래처럼 '달이 차오른다, 가자'. 그런데 말이다. 눈을 떠야 길을 떠날 거 아닌가?

밑에 단 동영상은 요즘 한참 뜨고 있는 장기하와 얼굴들이 미미 시스터스와 함께한 <달이 차오른다, 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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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9 11:00
말이 늙으면 시는 죽으리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있고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없을까? 일상어와 시어는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모든 일상어가 시어로 쓰일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문장과 대화에서 쓰이는 모든 말은 시어가 될 수 있다. 우리 현대시에는 표준어뿐만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방언과 비속어까지 심심찮게 시어로 등장했다. 김용택은, 

“환장하것네 환장하것어
아, 농사는 우리가 쌔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들이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풍년 잔치는 저그들이 먼저 지랄”
<마당은 비뚤어져도 장구는 바로 치자>

이라며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노골적으로 농민들의 편을 든다. 김진경은, 

"복어새끼처럼 왜 그런대유
배에다 바람을 잔뜩 집어넣구
가시를 있는 대루 세우믄 누가 무서워헐 줄 아남유”
<복어새끼처럼 왜 그런대유>

하고 충청도 말로 능청을 부린다. 안상학은, 

“보래요. 삼시세끼 빵만 묵고 살라믄 살니껴? 대한민국 워델 가도 그런 사람 없을께시더”
<강씨 FTA론>

라면서 경북 안동 말을 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김수영이 일찍이.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성>

며 너스레를 떨자, 한참 후에 이에 화답하듯 황지우도 풍자의 대열에 합류한다. 

“간밤에도 그는 외국 바이어들을 만났고, “그년”들을 대주고 그도 “그년들 중의 한 년”의 그것을 주물럭거리고 집으로 와서 또 아내의 그것을 더욱 힘차게, 더욱 전투적이고 더욱 야만적으로, 주물러주었다.”
<徐伐, 셔발, 셔블, 서울, SEOUL>

 이에 질세라 박남철은 한 발 앞서간다.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차렷, 열중쉬엇, 차렷,”
<독자놈들 길들이기>

하고 호통을 친다.

현대어뿐만 아니라 중세국어, 영어, 화살표 같은 기호까지 시어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문장에 쓰이는 마침표·쉼표·물음표·따옴표·줄표와 같은 부호가 시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못해 절대적이다. 심지어 옥타비오 파스는 침묵도 말이라고 한다.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데, 침묵은 무(無)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활과 리라>

그런데 시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강철 조각이 아니다. 적어도 용접공이 강철과 강철을 이을 때 일어나는 불꽃이거나 그 불꽃의 뜨거움이거나 불꽃이 내장하고 있는 위험한 미래여야 한다. 그래서 때로 시어는 한글맞춤법이나 국어순화운동에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나는 자장면보다 ‘짜장면’이, 메리야스보다 ‘런닝구’가, 브래지어보다는 ‘브라자’가, 펑크보다는 ‘빵꾸’가, 머큐로크롬보다 ‘빨간약’이나 ‘아까징끼’가 더 시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옥타비오 파스도 시적인 언어는 일상으로부터 일탈할 때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전통 속에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우리는 한자 혹은 한자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시인들은 한자의 형상이 드러내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한자가 시인들을 자극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호의 의미는 같지만 ‘산’이라고 쓸 때와 ‘山’이라고 쓸 때 그 함의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우스운 이야기 하나. 어릴 적에 나는 음식점 간판에 적힌 ‘산낙지’를 보고 한동안 산에 사는 낙지인 줄 알았다. 가재처럼 심산유곡의 돌덩이 밑 어디쯤 사는……)

그런데 뜻글자라고 해서 그 뜻과 형상이 다 미학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관념적인 한자어는 시에서 척결해야 할 대표적인 낡은 언어다. 시적 언어의 성취 목표를 한 50년 이전쯤에 두고 있는 사람일수록 관념적인 한자어를 쉽게 지워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유치환이 <깃발>에서 “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고 노래한 것은 1930년대 말이었고, 박인환이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라며 절망스러워한 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였다. 김현승이 ‘堅固한 고독’을 발표한 때는 60년대 중반이었다. 이 시인들이 ‘애수’와 ‘애증’과 ‘견고한 고독’을 노래할 즈음에 그 시어들은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그 시어들은 시간의 무덤에서 하얗게 풍화된 죽은 말들이다.

무엇보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써야만 그럴 듯한 시가 된다는 착각이 문제다. 정진규는 시에서 관념이 ‘화자의 우월적 포즈’(<질문과 과녁>)라고 꼭 집어 말한 바 있다. 당신은 관념적인 한자어가 시에 우아한 품위를 부여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품위는커녕 한자어 어휘 하나가 시 한 편을 누르는 중압감은 개미의 허리에 돌멩이를 얹는 일과 같다. 신중하고 특별한 어떤 의도 없이 아래의 시어가 시에 들어가 박혀 있으면 그 시는 읽어 보나마나 낙제 수준이다.

갈등 갈망 갈증 감사 감정 개성 격정 결실 고독 고백 고별 고통 고해 공간 공허 관념 관망 광명 광휘 군림 굴욕 귀가 귀향 긍정 기도 기억 기원 긴장 낭만 내공 내면 도취 독백 독선 동심 명멸 모욕 문명 미명 반역 반추 배반 번뇌 본연 부재 부정 부활 분노 불면 비분 비원 삭막 산화 상실 상징 생명 소유 순정 시간 신뢰 심판 아집 아첨 암담 암흑 애련 애수 애정 애증 양식 여운 역류 연소 열애 열정 영겁 영광 영원 영혼 예감 예지 오만 오욕 오한 오해 욕망 용서 운명 원망 원시 위선 위안 위협 의식 의지 이국 이념 이별 이역 인생 인식 인연 일상 임종 잉태 자비 자유 자학 잔영 저주 전설 절망 절정 정신 정의 존재 존중 종교 증오 진실 질서 질식 질투 차별 참혹 처절 청춘 추억 축복 침묵 쾌락 탄생 태만 태초 퇴화 패망 편견 폐허 평화 품격 풍자 피폐 필연 해석 행복 향수 허락 허세 허위 현실 혼령 혼령 화려 화해 환송 황폐 회상 회억 회의 회한 후회 휴식 희망

“진부한 말이란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는 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모든 경서와 옛사람들이 이미 언급한 말의 대부분이 이른바 진부한 말이다.”
(김창협, <농암잡지> 외편

시는 이런 진부한 시어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사유라는 것은 원래 그 속성상 관념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법이다. 하지만 관념을 말하기 위해 관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학대행위다. 관념어는 구체적인 실재를 개념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관념어가 시만 좀먹고 있는 게 아니다. 예식장에도 있다. 흔해빠진 주례사가 그것이다. 행복과 공경과 우애와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주례사가 귀에 들리면 한시바삐 밥을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황지우의 시처럼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늙어가는 아내에게)> 것, 그게 사랑의 표현 방식인 것이다.

관념어는 진부할 뿐 아니라 삶을 왜곡시키고 과장할 수도 있다. 또한 삶의 알맹이를 찾도록 하는 게 아니라 삶의 껍데기를 어루만지게 한다. 당신의 습작 노트를 수색해 관념어를 색출하라.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 암세포 같은 관념어를 죽이지 않으면 시가 병들어 죽는다. 상상력을 옥죄고 언어의 잔칫상이어야 할 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관념어를 척결하지 않고 시를 쓴다네, 하고 떠벌이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내고 나면 그 휑하니 빈자리가 몹시 쓸쓸하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그 빈자리를 오래 응시하라. 당신의 상상력이 가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상상력은 이미지라는 처녀를 데리고 올 것이다. 말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 처녀를 꽉 붙잡고 놓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낸 자리에 그 처녀를 정실부인으로 들어앉혀라. 그래도 관념어의 옛정이 그리워져 못 견디게 쓰고 싶거든 그 말을 처음 쓴 지 30년 후쯤에나 써라.

당신에게 시 한 편을 읽어주겠다. 이시영의 <그대의 시 앞에> 전문이다. 나는 이 시에서 ‘고독’이라는 말을 발견하고 온몸이 찌릿찌릿해졌다. 이쯤은 되어야 고독을 말할 자격이 있다.

고독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그건 사기리
밤새도록 앞뜰에 폭풍우 쓸고 지나간 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잔바람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로이 위태로이 자신의 전존재를 다해 사운거리고 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지난 봄부터 한겨레신문에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이라는 글이 실리고 있다. "웬 시?" 뜬금 없이 무슨 시 얘긴가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시대를 산문이나 소설로 풀어내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지랄 같은 시절과는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시로나 소통할 수 없는가 하는 절망감이랄까? 도무지 말을 해도 들을 줄 모르는 '미친'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에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이제 이 시대 우리에게는 오직 구호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알고 있는 시는 정말 알아들을 수 없는, 시인이라는 사람들의 허위의식이 만들어 내는 '황당한 상상력'만은 아니다. 사실 난 시를 좋아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 사람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시를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 물론 나는 시를 읽는 사람에 더 마음이 기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를 읽는 사람이 시를 읽지 않는 사람보다는 아무래도 조금이나마 더 여유 있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고 상상력의 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시를 읽지 못했다. 내게 요즘 어떤 시를 읽고 있다고 소개해 주는 사람도 없고, 꼭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도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정작 시를 읽지 않은 까닭은 따로 있다. 내가 게을러 일부러 찾아보려 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게 정직할 게다.

(집에 가서 이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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