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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에 해당되는 글 2건
2012.06.06 02:40


2011년에 읽은 책이 서른다섯 권이지만 사진 찍어 놓은 건 일곱 권밖에 없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최진영 씀, 한겨레출판, 2010년 7월 

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씀, 문학과지성사, 2010년 9월

부의 기원 에릭 바인하커 씀, 안현실/정설철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년 8월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김일영 씀, 실천문학사, 2009년 5월  

번역사 오디세이 쓰지 유미 씀, 이희재 옮김, 끌레마, 2008년 5월  

역사 헤로도토스 씀, 천병희 옮김, 숲, 2009년 2월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히라야마 유메아키 씀, 권일영 옮김, 이미지박스, 2008년 6월  

내 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 베네트 서프 씀, 정혜진 옮김,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4년 8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상 투키디데스 씀,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3년 6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하 투키디데스 씀,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3년 6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씀, 박재일/허승일 옮김, 까치, 2006년 9월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최정태 씀, 한길사, 2006년 8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 50 닐 스티븐슨 씀, 이영아 옮김, 동녘, 2008년 11월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씀, 정명진 옮김, 세종서적, 2000년 1월  

스트링 코스모스 남순건 씀, 지호, 2007년 3월   

끝까지 이럴래 김연 등 씀, 한겨레출판, 2010년 10월  

시가 내게로 왔다 5 김용택 엮음, 마음산책, 2011년 3월  

신의 입자를 찾아서 이종택 씀, 마티, 2008년 8월  

내 꿈에 국경은 없다 박희정 씀, 이덴슬리벨, 2008년 9월   

추락 존 쿳시 씀, 왕은철 옮김, 동아일보사, 2004년 3월   

기적의 사과 이사카와 다쿠지 씀, 이영미 옮김, 김영사, 2009년 7월  

표백 장강명 씀, 한겨레출판, 2011년 7월   

천자의 나라 상 김유인 씀, 오두막, 2005년 4월   

천자의 나라 하 김유인 씀, 오두막, 2005년 4월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최제훈 씀, 자음과모음, 2011년 1월   

청와대 vs 백악관 박찬수 씀, 개마고원, 2009년 7월   

세계대전 Z 맥스 브룩스 씀, 박산호 옮김, 황금가지, 2008년 6월   

몸으로 하는 공부 강유원 씀, 여름언덕, 2005년 7월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 J. L. 본 씀, 김지현 옮김, 황금가지, 2009년 11월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 2 J. L. 본 씀, 김지현 옮김, 황금가지, 2011년 6월  

잉글리시 디바이드 안준성 씀, 북카라반, 2011년 2월   

내 심장을 쏴라 정유정 씀, 은행나무, 2009년 5월  

7년의 밤 정유정 씀, 은행나무, 2011년 3월  

안나 카레니나 1 톨스토이 씀,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09년 12월   

안나 카레니나 2 톨스토이 씀,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09년 12월   


작년 한해 동안 읽은 책이 모두 서른다섯 권이다. 여기에는 내가 일 때문에 수도 없이 되풀이해 읽어야 한 책은 넣지 않았다. 맘 편하게 읽은 책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밥벌이하려고 읽은 것이라 독서 목록에 넣기는 좀 거시기 하다. 내가 작업한 책과 후배들 작업 봐준 게 대충 스무 권 정도 되는 듯하다. 

분야로 나누면 서른다섯 권 가운데 소설이 제일 많다. 열여섯 권. 특징을 꼽자면 아마 '종말 문학'이 아닐까 싶다. 남들은 연말 분위기 낼 때 난 <세계대전 Z>,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 2> 따위를 읽으며 종말을 간절히 기원했다. 드라마도 <워킹 데드> 같은 좀비물을 찾아 봤다. <세계대전 Z>나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은 좀비가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과정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재밌는 것은 둘 다 좀비가 창궐하기 시작한 곳을 중국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역시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며 세계의 시궁창인 것인가? 종말 문학 탐닉은 2012년 <종말 문학 걸작선>으로 이어졌다. 다행이라면 이 책에 크게 실망해 관심이 사라졌다는 것.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소설도 두 권 읽었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표백>. <표백>은 그냥 그랬다. 무엇보다 기본 전제나 설정이 억지스러워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역시 여자는 예쁘고 봐야 하는가? 반면에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은 글쓴이가 공들여 쓴 문장에서 묵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최제훈 소설도 두 권, 정유정 소설도 두 권 읽었다. 네 권 다 굉장했다. 문장, 이야기, 재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소설이었다. 다만 정유정이 2007년에 쓴 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는 좀 과장되고 지루해서 읽다 말았다. 

고전이라 할 만한 책은 다섯 권 읽었다.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상>,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하>, <안나 카레니나 1>, <안나 카레니나 2>(<안나 카레니나 3>은 2012년에 읽었다). <역사>는 천병희 번역본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박광순 번역본을, <안나 카레니나>는 박형규 번역본을 읽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2011년 6월에 천병희 번역본이, <안나 카레니나>는 2011년 12월에 윤새라 번역본이 새로 나왔다). <안나 카레니나>가 고전이라고 해서 읽기는 했다만 잘 모르겠다. 이건 뭐 러시아 귀족 안나가 그저 바람피우는 얘기 아닌가? 안나 오빠가 가정교사랑 바람 나는 걸로 시작하고 안나는 올케를 설득하려고 오다가 외려 기차에서 만난 장교랑 눈이 맞고 만다.    

<독서의 역사> 또한 재밌는 책이었다. '독서'를 얘기할 때마다 인용되는 책이라 읽게 됐는데 역사의 마디와 변곡점을 짚어 주는 글쓴이의 해박하고 박식한 상식과 교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별 볼 일 없는 얘긴데도 재밌었다. 상당히 두꺼운 <부의 기원>은 괜찮은 경제 서적인 듯하다. 복잡계가 어쩌구 하는데 나중에 다시 읽고 정리해 놓을 생각이다.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피와 살, 살갗과 내장의 교향악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 50><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건축, 영혼을 착하게 하는 예술에 몇 자 적어 놓았다. 시집은 두 권밖에 읽지 못한 게, 자기계발서는 두 권이나 읽은 게 아쉽다. 

2012년에는 몇 권이나 읽을까? <역사>에서 빌려 온 한 토막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무엇보다도 헬라스를 공격하는 것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오. 태어날 때부터 자기 몫의 행운에 불행이 섞이지 않은 인간은 아무도 없었고, 또 없을 것이오. 그리고 위대한 인간일수록 더 큰 불행을 당하는 법이오. 그러니 침략자도 인간인 만큼 그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 것이오." 이 말을 듣자 로크리스인들과 포키스인들은 트라키스를 도우러 갔다.       

<역사> 제7권 203장 


2008년 열네 권 / 2009년 쉰세 권 / 2010년 서른세 권 / 2011년 서른다섯 권 / 20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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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9 11:00
말이 늙으면 시는 죽으리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있고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없을까? 일상어와 시어는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모든 일상어가 시어로 쓰일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문장과 대화에서 쓰이는 모든 말은 시어가 될 수 있다. 우리 현대시에는 표준어뿐만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방언과 비속어까지 심심찮게 시어로 등장했다. 김용택은, 

“환장하것네 환장하것어
아, 농사는 우리가 쌔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들이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풍년 잔치는 저그들이 먼저 지랄”
<마당은 비뚤어져도 장구는 바로 치자>

이라며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노골적으로 농민들의 편을 든다. 김진경은, 

"복어새끼처럼 왜 그런대유
배에다 바람을 잔뜩 집어넣구
가시를 있는 대루 세우믄 누가 무서워헐 줄 아남유”
<복어새끼처럼 왜 그런대유>

하고 충청도 말로 능청을 부린다. 안상학은, 

“보래요. 삼시세끼 빵만 묵고 살라믄 살니껴? 대한민국 워델 가도 그런 사람 없을께시더”
<강씨 FTA론>

라면서 경북 안동 말을 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김수영이 일찍이.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성>

며 너스레를 떨자, 한참 후에 이에 화답하듯 황지우도 풍자의 대열에 합류한다. 

“간밤에도 그는 외국 바이어들을 만났고, “그년”들을 대주고 그도 “그년들 중의 한 년”의 그것을 주물럭거리고 집으로 와서 또 아내의 그것을 더욱 힘차게, 더욱 전투적이고 더욱 야만적으로, 주물러주었다.”
<徐伐, 셔발, 셔블, 서울, SEOUL>

 이에 질세라 박남철은 한 발 앞서간다.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차렷, 열중쉬엇, 차렷,”
<독자놈들 길들이기>

하고 호통을 친다.

현대어뿐만 아니라 중세국어, 영어, 화살표 같은 기호까지 시어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문장에 쓰이는 마침표·쉼표·물음표·따옴표·줄표와 같은 부호가 시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못해 절대적이다. 심지어 옥타비오 파스는 침묵도 말이라고 한다.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데, 침묵은 무(無)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활과 리라>

그런데 시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강철 조각이 아니다. 적어도 용접공이 강철과 강철을 이을 때 일어나는 불꽃이거나 그 불꽃의 뜨거움이거나 불꽃이 내장하고 있는 위험한 미래여야 한다. 그래서 때로 시어는 한글맞춤법이나 국어순화운동에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나는 자장면보다 ‘짜장면’이, 메리야스보다 ‘런닝구’가, 브래지어보다는 ‘브라자’가, 펑크보다는 ‘빵꾸’가, 머큐로크롬보다 ‘빨간약’이나 ‘아까징끼’가 더 시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옥타비오 파스도 시적인 언어는 일상으로부터 일탈할 때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전통 속에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우리는 한자 혹은 한자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시인들은 한자의 형상이 드러내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한자가 시인들을 자극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호의 의미는 같지만 ‘산’이라고 쓸 때와 ‘山’이라고 쓸 때 그 함의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우스운 이야기 하나. 어릴 적에 나는 음식점 간판에 적힌 ‘산낙지’를 보고 한동안 산에 사는 낙지인 줄 알았다. 가재처럼 심산유곡의 돌덩이 밑 어디쯤 사는……)

그런데 뜻글자라고 해서 그 뜻과 형상이 다 미학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관념적인 한자어는 시에서 척결해야 할 대표적인 낡은 언어다. 시적 언어의 성취 목표를 한 50년 이전쯤에 두고 있는 사람일수록 관념적인 한자어를 쉽게 지워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유치환이 <깃발>에서 “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고 노래한 것은 1930년대 말이었고, 박인환이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라며 절망스러워한 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였다. 김현승이 ‘堅固한 고독’을 발표한 때는 60년대 중반이었다. 이 시인들이 ‘애수’와 ‘애증’과 ‘견고한 고독’을 노래할 즈음에 그 시어들은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그 시어들은 시간의 무덤에서 하얗게 풍화된 죽은 말들이다.

무엇보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써야만 그럴 듯한 시가 된다는 착각이 문제다. 정진규는 시에서 관념이 ‘화자의 우월적 포즈’(<질문과 과녁>)라고 꼭 집어 말한 바 있다. 당신은 관념적인 한자어가 시에 우아한 품위를 부여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품위는커녕 한자어 어휘 하나가 시 한 편을 누르는 중압감은 개미의 허리에 돌멩이를 얹는 일과 같다. 신중하고 특별한 어떤 의도 없이 아래의 시어가 시에 들어가 박혀 있으면 그 시는 읽어 보나마나 낙제 수준이다.

갈등 갈망 갈증 감사 감정 개성 격정 결실 고독 고백 고별 고통 고해 공간 공허 관념 관망 광명 광휘 군림 굴욕 귀가 귀향 긍정 기도 기억 기원 긴장 낭만 내공 내면 도취 독백 독선 동심 명멸 모욕 문명 미명 반역 반추 배반 번뇌 본연 부재 부정 부활 분노 불면 비분 비원 삭막 산화 상실 상징 생명 소유 순정 시간 신뢰 심판 아집 아첨 암담 암흑 애련 애수 애정 애증 양식 여운 역류 연소 열애 열정 영겁 영광 영원 영혼 예감 예지 오만 오욕 오한 오해 욕망 용서 운명 원망 원시 위선 위안 위협 의식 의지 이국 이념 이별 이역 인생 인식 인연 일상 임종 잉태 자비 자유 자학 잔영 저주 전설 절망 절정 정신 정의 존재 존중 종교 증오 진실 질서 질식 질투 차별 참혹 처절 청춘 추억 축복 침묵 쾌락 탄생 태만 태초 퇴화 패망 편견 폐허 평화 품격 풍자 피폐 필연 해석 행복 향수 허락 허세 허위 현실 혼령 혼령 화려 화해 환송 황폐 회상 회억 회의 회한 후회 휴식 희망

“진부한 말이란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는 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모든 경서와 옛사람들이 이미 언급한 말의 대부분이 이른바 진부한 말이다.”
(김창협, <농암잡지> 외편

시는 이런 진부한 시어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사유라는 것은 원래 그 속성상 관념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법이다. 하지만 관념을 말하기 위해 관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학대행위다. 관념어는 구체적인 실재를 개념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관념어가 시만 좀먹고 있는 게 아니다. 예식장에도 있다. 흔해빠진 주례사가 그것이다. 행복과 공경과 우애와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주례사가 귀에 들리면 한시바삐 밥을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황지우의 시처럼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늙어가는 아내에게)> 것, 그게 사랑의 표현 방식인 것이다.

관념어는 진부할 뿐 아니라 삶을 왜곡시키고 과장할 수도 있다. 또한 삶의 알맹이를 찾도록 하는 게 아니라 삶의 껍데기를 어루만지게 한다. 당신의 습작 노트를 수색해 관념어를 색출하라.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 암세포 같은 관념어를 죽이지 않으면 시가 병들어 죽는다. 상상력을 옥죄고 언어의 잔칫상이어야 할 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관념어를 척결하지 않고 시를 쓴다네, 하고 떠벌이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내고 나면 그 휑하니 빈자리가 몹시 쓸쓸하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그 빈자리를 오래 응시하라. 당신의 상상력이 가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상상력은 이미지라는 처녀를 데리고 올 것이다. 말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 처녀를 꽉 붙잡고 놓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낸 자리에 그 처녀를 정실부인으로 들어앉혀라. 그래도 관념어의 옛정이 그리워져 못 견디게 쓰고 싶거든 그 말을 처음 쓴 지 30년 후쯤에나 써라.

당신에게 시 한 편을 읽어주겠다. 이시영의 <그대의 시 앞에> 전문이다. 나는 이 시에서 ‘고독’이라는 말을 발견하고 온몸이 찌릿찌릿해졌다. 이쯤은 되어야 고독을 말할 자격이 있다.

고독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그건 사기리
밤새도록 앞뜰에 폭풍우 쓸고 지나간 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잔바람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로이 위태로이 자신의 전존재를 다해 사운거리고 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지난 봄부터 한겨레신문에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이라는 글이 실리고 있다. "웬 시?" 뜬금 없이 무슨 시 얘긴가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시대를 산문이나 소설로 풀어내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지랄 같은 시절과는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시로나 소통할 수 없는가 하는 절망감이랄까? 도무지 말을 해도 들을 줄 모르는 '미친'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에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이제 이 시대 우리에게는 오직 구호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알고 있는 시는 정말 알아들을 수 없는, 시인이라는 사람들의 허위의식이 만들어 내는 '황당한 상상력'만은 아니다. 사실 난 시를 좋아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 사람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시를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 물론 나는 시를 읽는 사람에 더 마음이 기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를 읽는 사람이 시를 읽지 않는 사람보다는 아무래도 조금이나마 더 여유 있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고 상상력의 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시를 읽지 못했다. 내게 요즘 어떤 시를 읽고 있다고 소개해 주는 사람도 없고, 꼭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도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정작 시를 읽지 않은 까닭은 따로 있다. 내가 게을러 일부러 찾아보려 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게 정직할 게다.

(집에 가서 이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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