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에 한겨레를 다시 구독하면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
요즘은 신문을 몰아서 읽다 보니 칼럼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읽지 않은 신문이 두세 달 치 쌓여 있는데 이걸 언제 다 읽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 눈에 띄는 칼럼이 있어 몇 구절 옮겨 놓는다.
글쓰기는 결국 그 누구도 아닌 글쟁이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그렇듯이. 평화운동가 에이브러햄 머스트(1885~1967)의 일화. 그는 베트남전쟁 당시 백악관 앞에서 밤마다 촛불을 들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저녁, 한 방송 기자가 물었다. "혼자서 이런다고 세상이 변하고 나라 정책이 바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난 이 나라의 정책을 변화시키겠다고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나라가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글쓰기의 소임도 그렇지 않을까? 거창하게 남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국가와 비틀어진 현실이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가냘프지만 의미있는 행위.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 <어느 에세이스트의 절필>
“종교적 통찰은 관념적인 사색이 아니라 영성수련과 헌신적인 삶의 방식으로부터 나온다. 그러한 실천 없이 종교적 교리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녀 출신 신학자 캐런 암스트롱의 말이다.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주일 미사와 자동차>
요즘 키보드 치는 재미가 쏠쏠하다. 타자기 소리를 내주는 프로그램을 깔았는데 정말 타자기 치는 기분이다. 매킨토시 쓰는 사람이라면,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깔아 보시라. 자세한 건 요기를.
공도자가 물었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대인이 되고 어떤 사람은 소인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대체(大體)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
공도자가 다시 물었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대체를 따르고 어떤 사람은 소체를 따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귀나 눈 같은 기관은 사고를 못하여 사물에 가려진다. 사물과 사물이 만나면 끌어당길 뿐이다. 마음이라는 기관은 생각을 하니, 생각하면 깨닫게 되고, 생각하지 못하면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다. 큰 것을 먼저 확립하면 작은 것이 빼앗을 수 없다. 이것이 대인일 따름이다."
《맹자》 〈고자, 상〉
公都子問曰 "鈞是人也, 或爲大人, 或爲小人, 何也?"
孟子曰, "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
曰, "鈞是人也, 或從其大體, 或從其小體, 何也"
曰, "耳目之官不思, 而蔽於物. 物交物, 則引之而已矣. 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此天之所與我者.
先立乎其大者, 則其小者不能奪也. 此爲大人而已矣."
《孟子》 〈告子,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