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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불석권'에 해당되는 글 23건
2012.07.18 19:12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I Remember Nothing: And Other Reflections,

노라 에프런 씀, 김용언 옮김, 반비, 2012년 6월 8일


‘뉴욕것’ 그러니까 ‘뉴요커’(New Yorker)는 어떻게 살까? 


<한겨레>에 실린 책 소개 기사를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야 <섹스 앤드 더 시티>(Sex and the City)나 <프렌즈>(Friends)처럼 손발이 오그라드는 ‘미드’는 잘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네들 삶이 어떤지 궁금했다. 같은 한국 사람끼리도 알고 보면 얼마나 다른가? 더 다를 수밖에 없는 딴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그런 게 늘 궁금했다. 


더군다나 <뉴욕 타임스> 편집장 출신에, 로맨틱 코미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쓴 작가란다. 어쩌면 말로만 듣던 리무진 진보주의자(limousine liberals)의 일상을 엿볼 수 있을지 모른다. 괜한 관음증 비슷한 것일까? 아무튼 궁금한 걸 어쩌겠는가? 


대충 이런 게 서강도서관에 다른 책 반납하러 갔다가 신간 코너에 있는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를 냉큼 빌린 이유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은 여행 다니는 것도 싫어하고 나처럼 돈 없는 사람은 여행 다닐 여유도 없으니 결국 도서관에서 책이나 빌려 보는 것으로 대신할밖에......  


제일 앞에 있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억지로 글을 쓰는지 뭔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검색하러 갔다 오겠다고 하질 않나, 무슨 목록을 줄줄 써 놓지 않나...... 그런데 알고 보면 이 글은 기억에 관한 글이다(사실 이 책 전체가 기억과 늙음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수년 동안 뭔가를 잊어왔다. 요즘 나는 뭔가 새로운 방식으로 잊어버리고 있다. 이전에는 잊은 것이 무엇이건 그것을 곧 기억에서 끄집어내서 머릿속으로 가져올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이제 나는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 잊어버린 것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말들을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_12쪽.


그런데 이 양반, 좀 심하다. 


“그보다 한 달 전에 라스베이거스의 어느 백화점에서 나는 무척 호감 가게 생긴 여자가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 두 팔을 뻗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 여자 도대체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그녀가 뭔가를 말했고, 그제야 나는 그녀가 내 동생 에이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에이, 동생이 라스베이거스에 있을지 어떻게 알았겠어. 미안하다. 사실 그날 내가 그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바로 내 동생이었다.” _13쪽.


그래도 글쓴이는 망각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에 금방 적응한 듯하다. 바로 신기술이다. 


“나는 구글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장점도 있다. 뭔가를 잊어버리면 아이폰을 채찍질해서 구글로 검색해보면 된다. 시니어 모먼트(나이 많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깜빡깜빡하는 건망증 증세-옮긴이)는 구글 모먼트가 되어가고 있다. 

(중략)

그냥 구글로 가서 찾아오면 끝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삶을 찾아올 수는 없다. (위키피디아에 나올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당신은 삶의 뭔가 왜곡된 버전을 찾아오게 될 것이다.)” _21쪽.


역시나 노라 에프런은 위키에 자기 페이지가 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면 클릭해 보시라. 노라 에프런 위키 페이지.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꼭지는 <저널리즘에 대한 러브 스토리>다. 자신이 어떻게 기자가 됐는지 들려주는 꼭지다. 1962년 노라는 웰즐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스위크>에 우편 담당 아가씨로 입사한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기자를 꿈꾸기는 했지만 <뉴스위크>에 면접 보러 간 건 순전히 직업소개소의 추천 때문이란다. 당시 <뉴스위크>에는 여성 필자(writer, 그 무렵에는 리포터가 기삿거리를 취재해 보내면, 필자가 사무실에서 리포터가 보내오는 자료를 취사선택해 기사를 썼다고 한다)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회사도 여성 필자를 키울 의지, 아니 생각조차 없었다. 우편 담당 아가씨 노라는 곧 ‘엘리엇 아가씨’가 된다. 엘리엇 아가씨가 됐다는 건 노라가 필자가 보낸 원고를 에디터에게 배달하는 일을 하게 됐다는 뜻이다(에디터 중 한 사람이 오즈번 엘리엇이라서 자신을 그렇게 부른 듯하다)


“일은 정말 자기 몰입적인 방식으로 흥미진진했다. 이것이야말로 저널리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는 어떤 출판물을 만드는 사람이건 자신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나머지 세계가 전부 초조하게 다음 호, 다음 출간물을 기다리고 있다고 정말로 믿게 된다.” _32쪽. 


몇 달 뒤 노라는 전국 신문을 날마다 스크랩하는 자료 정리 담당자가 됐고 다시 석 달 뒤에는 조사 담당자가 된다. 이렇게 우편 담당 아가씨에서 조사 담당자가 되는 데 여섯 달이 걸렸다. 그러다 <뉴욕 포스트>의 리포터 테스트를 제의받고 정규직 리포터가 된다. 그 과정 또한 재미있다. 노라는 빅터 나바스키라는 친구의 부탁으로 틈틈이 <뉴욕 포스트>를 패러디한 <뉴욕 페스트>에 패러디 기사를 쓴다. <뉴욕 포스트> 에디터들은 <뉴욕 페스트>를 고소해야 한다고 방방 뛰지만, 외려 <뉴욕 포스트> 발행인인 도로시 시프는 이렇게 말한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 사람들이 <뉴욕 포스트>를 패러디할 수 있으면, <뉴욕 포스트> 기사도 쓸 수 있을 거야. 그 사람들 다 고용해!”_42쪽. 


 “나는 <뉴욕 포스트>를 사랑했다. 그곳도 물론 동물원이었다. 에디터는 완전히 호색한이었고 경영 담당 에디터는 사이코였다. 때로는 직원의 반 이상이 만취 상태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일을 사랑했다. 그곳에서 보낸 첫 한 해 동안 나는 글 쓰는 법을 배웠다. (시작할 땐 글쓰기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에디터와 카피 에디터(에디터를 보조하는 역할. 글의 각종 오류를 체크하고 전체적인 수정 방향을 제안하는 역할을 한다.-옮긴이)들이 나를 훈련시켰다. 그들은 말 그대로 내 유모들이었다. 처음엔 짧은 글을 쓰게 하고, 그다음엔 좀 더 긴 글들을 쓰게 하고, 그러다 다섯 쪽짜리 연재물을 맡겼다. 나는 그 과제들을 해내면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다. _46쪽. 


외삼촌이 남긴 '막대한' 유산 때문에 동생 하나와 사이가 어그러진 이야기를 담은 <나는 상속녀였다>와 “나는 비버리힐스에 있는 스페인식 집에서 성장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전설>도 재미있다. 좀 산만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가 쓴 책답게 재미있다. 물론 재미있기만 한 건 아니다. 반전도 있다. 이를테면,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그렇다. 


“한번은 어머니가 이 사람을 포함해 다른 동료 여성들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 나를 데려간 적이 있는데, 그들 중 아무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병행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번번이 강조했다시피, 요리도 맛있게 했다. 내조도 거뜬히 해냈고 심지어 옷도 근사하게 차려 입었다. 

이는 모든 걸 다해내는 슈퍼우먼에 대한 생각이 유행하기도 전의 일이다. 우리 어머니는 정말 그 모든 것을 다 해치웠다. 그리고 미치광이 주정쟁이로 전락하면서 이야기를 망쳐버렸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_51쪽. 


노라는 대단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렇지만 그 대단한 어머니가 몰락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노라가 세 번 결혼한 것과 그 결혼 전에 두 번이나 이혼했다는 사실에 비춰 보면 한편으로는 유쾌한 인생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애잔한 인생이었을 듯하다. 인생이란 게 그런 것인가? 그래도 노라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건 그 자신이 삶을 낙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배고프다. 이 문장을 인용하는 걸로 마치련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나의 신념은 ‘털고 일어나자’다.” _172쪽. 


아, 방금(2012년 7월 19일 아침 9시 45분) 알게 된 소식. 노라 에프런이 2012년 6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올해로 일흔한 살....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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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3 19:53


로드 the Road 코맥 매카시 씀, 정영묵 옮김, 문학동네, 2008년 6월 

모두 불타 버렸다. 온통 잿빛이다. 그 거대한 회색빛에 세상은 제 빛깔을 잃었다. 몇몇 살아남은 이들은 빛깔과 함께 이름마저 잃었다. 주인공은 남자, 아이는 소년일 뿐이다. 이름을 잃으면 인간성 또한 사라지기 마련일까? 그나마 목숨을 부지한 이들 사이에 약탈이 횡행한다. 언제 어디서 습격당할지 모른다. 잡히면 체온이 날아가기도 전에 바로 바비큐가 될 운명이다. 세상은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투쟁, 아니 사냥하는 곳으로 돌변했다. 그저 모든 빛을 집어삼킨 잿빛 사이로 숨어 다닐 뿐이다. 

언제, 어떻게 불이 세상을 삼켜 버렸는지 알 수 없다. 기억은 희미할뿐더러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제 와서 아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남자는 목숨을 이어가는 게, 무엇보다도 이 잿빛 세상에서 아들을 지켜 주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다. 두 사람은 남쪽 바다로 향한다. 가능할까? 정작 자신은 병들었지 않은가? 바다는 잿빛 육지와 다를까? 그곳은 따뜻할까? 바다는 두 사람에게 안식처가 돼 줄까? 희망은, 구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한텐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죠?”
“그래.”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요.”
“그래,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


글을 이렇게 건조하게 쓰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더 신기한 건 이 소설이 2006년에 출간된 뒤로 꽤 많이 팔렸을 뿐만 아니라 2007년에 퓰리처상까지 받았다는 사실일 듯). 잿빛 세상에 못지않은 잿빛 문체였다. 책 읽기 또한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래알처럼 망막을 긁어 대는 기분이었다. 하도 괴롭고 힘들어서 그냥 흘려 넘긴 부분도 상당하다. 읽는 데 3시간쯤 걸렸다. 328쪽, 한 쪽에 20행씩이니까 분량이 많은 책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사실 난 별 감흥이 없었다. 내 감성은 하도 메마르고 메말라 거의 황무지 같은데 잿빛 문체로 그런 마음을 녹인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다만 막막하고 답답했다. 나라면 자살용으로 남긴 총알 두 알을 진작 쓰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나 같지 않았다. 그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를 이끌고 길을 나섰고 어떻게든 먹을 것을 찾아냈다. 남자는 마지막 총알을 끝까지 유보한다. 아들이 있기 때문일까? 나야 늘 혼자라 무책임하고 무심할 수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 잿빛 세상으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있었겠지만 내 눈은 그걸 감별해 내기에는 많이 부족한 듯하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만 잇따른다. 남자와 아이가 잃지 않으려 애쓴 그 불은 무엇을 뜻할까? 단지 작가는 인간이 희망을 잃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삶이란 게 굳이 종말을 맞은 세상이 아니더라도 황량한 건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하루 마흔 명씩 자살하는 우리 사회야말로 벌써 잿빛 사회가 아닐까? 어떤 소설 제목처럼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인 세상이다.

처음에는 책도 읽고 2010년에 개봉한 영화도 찾아서 보려고 했지만 잿빛 영상에 내 마음이 아예 새까맣게 타 버릴까 봐 보지 않기로 했다. 인간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 며칠 전에 김형국 목사님이랑 통화했다. 그나마 (인간이) 공동체와 예배를 포기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정녕 구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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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6 02:40


2011년에 읽은 책이 서른다섯 권이지만 사진 찍어 놓은 건 일곱 권밖에 없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최진영 씀, 한겨레출판, 2010년 7월 

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씀, 문학과지성사, 2010년 9월

부의 기원 에릭 바인하커 씀, 안현실/정설철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년 8월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김일영 씀, 실천문학사, 2009년 5월  

번역사 오디세이 쓰지 유미 씀, 이희재 옮김, 끌레마, 2008년 5월  

역사 헤로도토스 씀, 천병희 옮김, 숲, 2009년 2월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히라야마 유메아키 씀, 권일영 옮김, 이미지박스, 2008년 6월  

내 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 베네트 서프 씀, 정혜진 옮김,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4년 8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상 투키디데스 씀,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3년 6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하 투키디데스 씀,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3년 6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씀, 박재일/허승일 옮김, 까치, 2006년 9월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최정태 씀, 한길사, 2006년 8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 50 닐 스티븐슨 씀, 이영아 옮김, 동녘, 2008년 11월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씀, 정명진 옮김, 세종서적, 2000년 1월  

스트링 코스모스 남순건 씀, 지호, 2007년 3월   

끝까지 이럴래 김연 등 씀, 한겨레출판, 2010년 10월  

시가 내게로 왔다 5 김용택 엮음, 마음산책, 2011년 3월  

신의 입자를 찾아서 이종택 씀, 마티, 2008년 8월  

내 꿈에 국경은 없다 박희정 씀, 이덴슬리벨, 2008년 9월   

추락 존 쿳시 씀, 왕은철 옮김, 동아일보사, 2004년 3월   

기적의 사과 이사카와 다쿠지 씀, 이영미 옮김, 김영사, 2009년 7월  

표백 장강명 씀, 한겨레출판, 2011년 7월   

천자의 나라 상 김유인 씀, 오두막, 2005년 4월   

천자의 나라 하 김유인 씀, 오두막, 2005년 4월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최제훈 씀, 자음과모음, 2011년 1월   

청와대 vs 백악관 박찬수 씀, 개마고원, 2009년 7월   

세계대전 Z 맥스 브룩스 씀, 박산호 옮김, 황금가지, 2008년 6월   

몸으로 하는 공부 강유원 씀, 여름언덕, 2005년 7월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 J. L. 본 씀, 김지현 옮김, 황금가지, 2009년 11월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 2 J. L. 본 씀, 김지현 옮김, 황금가지, 2011년 6월  

잉글리시 디바이드 안준성 씀, 북카라반, 2011년 2월   

내 심장을 쏴라 정유정 씀, 은행나무, 2009년 5월  

7년의 밤 정유정 씀, 은행나무, 2011년 3월  

안나 카레니나 1 톨스토이 씀,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09년 12월   

안나 카레니나 2 톨스토이 씀,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09년 12월   


작년 한해 동안 읽은 책이 모두 서른다섯 권이다. 여기에는 내가 일 때문에 수도 없이 되풀이해 읽어야 한 책은 넣지 않았다. 맘 편하게 읽은 책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밥벌이하려고 읽은 것이라 독서 목록에 넣기는 좀 거시기 하다. 내가 작업한 책과 후배들 작업 봐준 게 대충 스무 권 정도 되는 듯하다. 

분야로 나누면 서른다섯 권 가운데 소설이 제일 많다. 열여섯 권. 특징을 꼽자면 아마 '종말 문학'이 아닐까 싶다. 남들은 연말 분위기 낼 때 난 <세계대전 Z>,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 2> 따위를 읽으며 종말을 간절히 기원했다. 드라마도 <워킹 데드> 같은 좀비물을 찾아 봤다. <세계대전 Z>나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은 좀비가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과정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재밌는 것은 둘 다 좀비가 창궐하기 시작한 곳을 중국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역시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며 세계의 시궁창인 것인가? 종말 문학 탐닉은 2012년 <종말 문학 걸작선>으로 이어졌다. 다행이라면 이 책에 크게 실망해 관심이 사라졌다는 것.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소설도 두 권 읽었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표백>. <표백>은 그냥 그랬다. 무엇보다 기본 전제나 설정이 억지스러워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역시 여자는 예쁘고 봐야 하는가? 반면에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은 글쓴이가 공들여 쓴 문장에서 묵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최제훈 소설도 두 권, 정유정 소설도 두 권 읽었다. 네 권 다 굉장했다. 문장, 이야기, 재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소설이었다. 다만 정유정이 2007년에 쓴 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는 좀 과장되고 지루해서 읽다 말았다. 

고전이라 할 만한 책은 다섯 권 읽었다.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상>,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하>, <안나 카레니나 1>, <안나 카레니나 2>(<안나 카레니나 3>은 2012년에 읽었다). <역사>는 천병희 번역본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박광순 번역본을, <안나 카레니나>는 박형규 번역본을 읽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2011년 6월에 천병희 번역본이, <안나 카레니나>는 2011년 12월에 윤새라 번역본이 새로 나왔다). <안나 카레니나>가 고전이라고 해서 읽기는 했다만 잘 모르겠다. 이건 뭐 러시아 귀족 안나가 그저 바람피우는 얘기 아닌가? 안나 오빠가 가정교사랑 바람 나는 걸로 시작하고 안나는 올케를 설득하려고 오다가 외려 기차에서 만난 장교랑 눈이 맞고 만다.    

<독서의 역사> 또한 재밌는 책이었다. '독서'를 얘기할 때마다 인용되는 책이라 읽게 됐는데 역사의 마디와 변곡점을 짚어 주는 글쓴이의 해박하고 박식한 상식과 교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별 볼 일 없는 얘긴데도 재밌었다. 상당히 두꺼운 <부의 기원>은 괜찮은 경제 서적인 듯하다. 복잡계가 어쩌구 하는데 나중에 다시 읽고 정리해 놓을 생각이다.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피와 살, 살갗과 내장의 교향악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 50><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건축, 영혼을 착하게 하는 예술에 몇 자 적어 놓았다. 시집은 두 권밖에 읽지 못한 게, 자기계발서는 두 권이나 읽은 게 아쉽다. 

2012년에는 몇 권이나 읽을까? <역사>에서 빌려 온 한 토막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무엇보다도 헬라스를 공격하는 것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오. 태어날 때부터 자기 몫의 행운에 불행이 섞이지 않은 인간은 아무도 없었고, 또 없을 것이오. 그리고 위대한 인간일수록 더 큰 불행을 당하는 법이오. 그러니 침략자도 인간인 만큼 그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 것이오." 이 말을 듣자 로크리스인들과 포키스인들은 트라키스를 도우러 갔다.       

<역사> 제7권 203장 


2008년 열네 권 / 2009년 쉰세 권 / 2010년 서른세 권 / 2011년 서른다섯 권 / 20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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